잣대란 자로 쓰는 대막대기나 나무 막대기 따위를 이르는 말로 어떤 현상이나 문제를 판단하는 데 의거하는 기준을 비유적으로 하는 말이다. 같은 경우를 만나도 사람에 따라 또는 상황에 따라 평가하는 잣대가 다르다. 정답이 없는 세상에 살면서 언제나 자신의 잣대는 틀림없다고 고집하면 서로 피곤하고 불편해진다. 그냥 좋은게 좋다는 식으로 어물쩡 넘어가자는 얘기가 아니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잣대에 대해 존중하고 인정하는 태도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런데 문명은 빠른 속도로 발달하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의 잣대는 점차 유연성이 사라지고 엄격해지고 있다. 경제적인 양극화를 넘어 잣대의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다. 편가르기는 잣대의 가장 원초적인 나쁜 행태다.
코로나19로 인해 절대 기준이 길을 잃고 있다. 누군가 만들어 놓은 틀에 과연 들어가야 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단계에서도 어김없이 잣대는 등장한다. 미국 트럼프 대통령이 유독 마스크 착용을 꺼렸던 이유도 그의 잣대에 기인한다. 유럽에 사는 많은 사람들의 마스크 거부 현상도 다르지 않다. 코로나19 확진자가 급속히 많아지자 이제는 잣대를 바꿔 트럼프 대통령도 마스크를 하고 다닌다. 생각보다 사람은 나이가 들면서 쓸데없는 아집에 사로 잡힌다. 문제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신만은 그런 아집에 빠져들고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냥 지금까지 자신의 잣대로 살아온 경험에 비추어 주위 사람들의 조언도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의 주장만 앞세운다. 별일 아닌 경우에도 그렇게 한다.
유연한 잣대를 가지려면 우선 마음이 열려 있어야 한다. 무언가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의도가 숨어 있으면 유연성을 갖기 어렵다. 인간의 본성은 어떤 의도 없이 거의 행동하는 법이 없다. 자신의 본성을 거스르며 유연성을 가지려면 평소 끊임없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갑자기 유연한 잣대를 보여줄 수는 없다는 뜻이다. 매사 내 뜻대로 되지 않아도 얼마든지 다른 사람의 의견을 수렴하는 자세가 되어 있으면 이런 유연성이 자연스럽게 나타난다. 그렇지 않으면 습관에 따라 다른 사람의 의견이 조금이라도 자신의 생각과 다르면 일단 브레이크를 걸고 자신의 주장만 강하게 펼친다. 종종 대화하는 과정에 이런 부류의 사람들을 보게 된다. 안타까운 일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유연한 잣대를 가진 사람은 없다. 많은 사람들이 버럭 소리지르며 수시로 화를 참지 못하는 경험을 오래 지속하면 유연성은 결코 찾아오지 않고 도망가 버린다. 일단 누구든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태도가 우선이다. 존중은 존경과는 다르다. 인간으로서 한사람의 인격체를 인정하는 것이 존중이다. 반드시 무엇인가 주고 받아야만 유연한 잣대를 가지는 것도 아니다. 자신을 돌아보고 성찰하는 과정을 통해 성숙해지면 잣대도 유연해진다. 돈이 많고 명예와 지위가 높으면 더 유연한 잣대를 가질 것이라고 생각되지만 현실은 정반대이다. 오히려 그냥 평범하게 사는 서민들이 더 유연하다. 코로나19의 영향으로 많은 직업이 사라지고 새로운 직업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유연한 사고와 잣대로 자신만의 평생직업을 찾아야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