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중견 출판사 편집장이다. 냉면, 우동, 파스타 등 면(麵)이라면 가리지 않고 좋아한다는 공통점이 있어서 가끔 ‘면식범’ 모임을 통해 책과 지식산업 이야기를 나누곤 하는 사이다. 일 때문에 조금 늦게 올 때면 신간을 들고나와 이렇게 웃기고는 했다. “면을 먹는 자리에 책 들고나왔으니 ‘면책’ 사유는 되겠죠?”
늘 활력 넘치던 그녀가 어느 날 표정이 무거웠다. 조심스레 물어보니 사표를 냈다는 뜻밖의 답변이 흘러나왔다.
“제 역할이 없어서요. 저자, 주제, 콘셉트 등 모든 것을 위에서 다 결정해요. 그런데 결과가 좋지 않으면 저에게 책임이 돌아옵니다. 제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억울하게 혼나는 날이 많아졌어요. 하루하루 지옥 같아요!”
그녀의 설명에 따르면 1년 전쯤 편집장 위의 직급으로 한 사람이 오면서부터 이상한 조짐이 시작됐다고 한다. 연봉은 많지 않아도 동료들 사이 분위기가 화목해서 직장생활 하는 맛이 있었는데, 언젠가부터 부서 간 갈등이 심해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새로 온 상사는 ‘성과는 나의 것, 실수는 아래 탓’인 유형이었던 것 같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제대로 평가가 이뤄지지 않으면 열정은 식는다. 직장문화가 악화일로에 있었지만, 사장은 그런 분위기를 전혀 모르고 있고 알릴 통로도 꽉 막혀 있다는 게 문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