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런던올림픽 개막식 때다. 당시 버킹엄궁으로 검은색의 런던 택시가 들어가면서 영상은 시작된다. 이어 제임스 본드 역의 다니엘 크레이그가 택시에서 나와 궁궐 계단을 가볍게 뛰어 올라가 복도를 걸어 들어간다. 그 뒤를 여왕의 애견인 웰시코기들이 따라간다. 그리고는 시종의 안내로 여왕의 접견실로 들어선다. 그때까지 여왕은 책상에 앉아 뭔가를 쓰고 있다. 제임스 본드가 들어온 걸 아는지 모르는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있다. 차렷 자세로 서 있던 제임스 본드는 드디어 참지 못하고 가벼운 기침을 하자 여왕은 뒤를 돌아보면서 “굿 이브닝 미스터 본드”라면서 일어선다. 그리고는 분홍색 드레스를 입은 여왕과 본드가 버킹엄궁 뒤 정원에 대기하고 있던 헬리콥터에 같이 탄다. 여왕과 본드를 태운 헬리콥터는 고색창연한 런던 시내 상공을 비행하며 런던탑 앞 타워브리지의 두 첨탑 사이를 지나 올림픽경기장이 있는 동쪽으로 향한다. 이런 광경은 개막식이 열리는 주경기장의 대형 스크린은 물론 전 세계에 방영됐다. 그때만 해도 모두들 실시간 생중계인 줄 알았고 누구도 마지막 순간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드디어 헬리콥터는 주경기장 상공에 도달한다. 모두들 헬리콥터가 주경기장에 착륙하면 여왕이 본드와 같이 내려서 손을 흔들면서 주빈석으로 올라갈 줄 알았다. 그러나 기상천외한 드라마가 벌어졌다. 헬리콥터 조종사가 뒷자리의 본드에게 엄지손가락을 세워 신호를 보내자 본드가 문을 열고 아래 상황을 살핀다. 갑자기 화면은 상공에 선회하는 헬리콥터를 밑에서 비춘다. 그런데 갑자기 분홍 드레스를 입은 여왕이 헬리콥터 문 밖으로 뛰어내리는 것이 아닌가? 순간적으로 세계는 경악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여왕이 헬리콥터에서 뛰어내려? 다시 화면은 추락하던 여왕이 낙하산을 펼치고 천천히 내려오는 광경을 보여주고 있었다. 모두들 이 영상이 생중계가 아니라는 사실을 감쪽같이 몰랐다. 필자도 현장에서 여왕(물론 여왕 모습을 한 대역)이 치마를 뒤집어쓰고 낙하산을 타고 내려오는 장면을 너무 놀라 입을 벌리고 쳐다보았다. 낙하산이 경기장에 도착할 때쯤 007 주제가가 주경기장에 울려 퍼지자 ‘여왕 폐하가 입장하신다’는 안내와 함께 실제 여왕 부부가 등장함으로써 6분15초의 영상은 막을 내렸다.
당시 런던은 올림픽 개막식은 반드시 엄숙하고 거대해야 한다는 통념을 깨버렸다. 영화감독 대니 보일의 개막식에는 이렇게 영국인들의 유머가 그대로 나타나 있다. 특히 제임스 본드와 여왕의 협연은 여왕의 전적인 협조가 없었으면 불가능했다. 처음에 이런 아이디어가 작가 프랭크 코트렐 보이스와 제작진 사이에서 떠올랐을 때만 해도 여왕이 직접 출연한다는 것은 감히 생각지도 못했다고 한다. 제작진은 그냥 버킹엄궁에 개막식날 여왕이 어떤 옷을 입을 것인지를 알고자 문의했다. 그러자 여왕의 의상 담당자는 “왜 그런 걸 묻느냐”고 물었고 제작진은 올림픽 개막식에 다니엘 크레이그와 여왕 대역이 출연하는 영상 필름을 촬영하는데 대역이 입을 옷을 준비하려고 한다고 답했다. 그런데 다음날 여왕 의상 담당자가 궁으로 코트렐 보이스와 제작진을 들어오라고 했다. 아무런 생각 없이 궁으로 들어간 제작진에게 의상 담당관은 여왕이 대역이 아니라 직접 출연하고 싶어 한다면서 당장 면담을 하라고 했다. 그 뒤로 제작진은 수시로 궁으로 여왕을 만나러 갔고 여왕은 일일이 제작에 관여하면서 직접 출연까지 했다.(헬기 낙하 장면만 대역이다.) 심지어 어떤 헬리콥터가 타워브리지 첨탑 사이와 보도의 사각형 공간을 무사히 지나갈 수 있는지까지 제작진에게 알려주면서 해박한 항공기 지식을 뽐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대사 하나를 반드시 말하겠다고 간청을 해서 결국 단 한 줄짜리 대사인 “굿 이브닝 미스터 본드”를 직접 했다. 다니엘 크레이그도 한마디 하지 않았는데 자신만 유일하게 대사를 쳤다고 여왕은 두고두고 자랑하면서 흐뭇해했다고 한다. 여왕은 가족들은 물론 심지어 남편 필립공에게까지 올림픽 개막식날 자신이 무얼 하는지, 무슨 일이 벌어질지 입을 굳게 다문 채 비밀을 지켰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