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안계환 지음 『신들의 이사』
– 신들이 옮겨 다닌 자리에서 문명을 읽다
신은 떠나지 않는다, 다만 이름을 바꿀 뿐
건물 하나가 오백 년, 천 년을 버티는 동안 그 안에서 섬기던 신은 몇 번이나 바뀌었을까. 안계환 작가는 이 단순하지만 낯선 질문 하나로 『신들의 이사』 전체를 관통합니다. 아야소피아든 파르테논이든, 겉모습은 그대로여도 그 안을 채운 신앙과 권력은 정복자가 바뀔 때마다 함께 옮겨 다녔다는 것이죠. 저자는 이 반복되는 ‘이사’의 흔적을 지도 위에 하나하나 짚어가며, 문명이 단절이 아니라 겹겹이 쌓인 지층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다섯 번 바뀐 아야소피아, 그리고 잘 알려지지 않은 네 번째 반전
아야소피아 이야기는 익숙합니다. 유스티니아누스의 성당, 메흐메트 2세의 모스크, 아타튀르크의 박물관, 그리고 다시 모스크로. 그런데 저자는 이 익숙한 서사 사이에 묻혀 있던 사건 하나를 끄집어냅니다. 1204년 제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키며 벌어진 약탈과 개종입니다. 정교회 성당이던 아야소피아가 로마가톨릭 주교의 손에 넘어갔다가, 1261년 비잔틴제국의 재건과 함께 다시 정교회로 돌아온 사건이죠. 흔히 알려진 세 번의 변화가 아니라 다섯 번의 변화였다는 것을 짚어내는 이 대목에서, 저자가 얼마나 꼼꼼하게 사료를 파고들었는지가 드러납니다.
파르테논의 잊힌 십자가와 미흐라브
더 흥미로운 것은 파르테논 이야기입니다. 아테나 여신의 신전으로 시작해 비잔틴제국 치하에서 ‘테오토코스 아테니오티사’, 즉 성모 마리아를 모신 정교회 성당이 되었고, 콘스탄티노플·에페소스·테살로니키에 이은 제국 4대 순례지로 격상되기까지 했다는 사실은 그리 널리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이후 1204년 십자군 원정으로 로마가톨릭 성당이 되었다가, 1456년 오스만의 메흐메트 2세에 의해 모스크로 개조되고, 끝내 화약고로 쓰이다 베네치아군의 포격으로 오늘날의 폐허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된 과정은 한 건축물의 연대기를 넘어 지중해 문명 전체의 축소판처럼 읽힙니다.
발로 쓴 문명사
이 책의 진짜 힘은 저자 자신의 이력에서 나옵니다. 안계환 작가는 인문학 전공자가 아니지만, 40대에 접어들며 스스로를 ‘문명 여행자’로 재정의하고 독학과 답사, 강의를 병행해 온 사람입니다. 이번 책은 그의 열일곱 번째 저작이며, 여행이 금지된 시리아를 제외하면 책 속 대부분의 장소를 저자가 직접 발로 딛고 확인한 뒤 써 내려간 결과물입니다. 책상 위에서 짜맞춘 역사가 아니라, 현장에서 확인한 사실 위에 쌓아 올린 서술이라는 점이 문장 곳곳에서 느껴집니다.
사진과 지도로 문명을 읽는 법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저자가 문명을 설명하는 방식입니다. 지명과 인물을 나열하는 대신 사진과 지도 위에 사건을 배치해 공간적으로 이해시키는 방식은, 막연하게 흩어져 있던 지식들을 하나의 좌표 위로 끌어모아 줍니다. 코로나 팬데믹 기간 동안 화상 강의와 그리스 음식점에서 열리고 있는 심포지온 모임을 통해 이런 강연을 직접 들어온 독자라면, 이 책이 그 강의의 정수를 응축해 놓은 결과물이라는 것을 금세 알아차릴 것입니다.
종이책도, 전자책도
요즘처럼 책이 잘 읽히지 않는 시대에도 저자는 종이책과 전자책을 함께 내놓으며 접근성을 넓히고 있습니다. 부담 없는 가격에 이만큼 밀도 있는 문명 이야기를 담아낸 책을 만나기는 쉽지 않습니다.
맺으며
『신들의 이사』는 결국 신이 아니라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신전과 성당과 모스크의 문패가 바뀔 때마다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은 언제나 새로운 권력과 신앙이었고, 그 흔적을 오늘날까지 남긴 것은 인간의 욕망과 신념이었습니다. 아야소피아와 파르테논이라는 두 상징적 건축물을 통해 지중해 문명의 파란만장한 흐름을 이토록 생생하게 되짚어낸 책은 흔치 않습니다. 익숙한 이야기 뒤에 숨은 낯선 진실을 찾고 싶은 독자에게 이 책을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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