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츨러(Kanzler)’라는 독일어는 총리 혹은 수상이라고 번역되지만, 그 이면에는 남성적 권위주의와 카리스마의 어감이 가득 담겨 있었다. 철혈 재상 비스마르크, 동서독 통일의 주역 헬무트 콜 같은 인물이 대표적이다.
2005년 앙겔라 메르켈이 집권했을 때만 해도 운이 좋아 총리가 되었을 뿐 임시 지도자라는 예측이 많았다. 정치인으로 유리해 보이지 않은 조건을 두루 갖췄기 때문이다. 동독 출신에 여성이며 이혼 경력이 있고 법률가가 아닌 과학자였다. 패거리 중심의 세력정치와도 거리를 두었다. 그러나 이후 메르켈은 연속 4선에 성공하며 16년간 독일 총리직을 완수한 뒤 오는 26일 자리를 떠난다. 시사주간지 ‘타임’은 ‘패스브레이커(pathbreaker)’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새로운 길을 여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가장 성공한 여성 리더십의 상징이 된 비결은 어디에 있을까?
나는 그녀를 두 번 보았다. 한 번은 베를린 특파원 시절 연방기자협회(BPK) 초청 기자회견장에서, 또 한 번은 슈퍼마켓에서 장을 보고 나올 때였다. 동네에서 흔히 마주치는 매우 소탈한 외모의 소유자이지만, 일단 회견에 들어가면 자료나 메모조차 없이 소수점 단위까지 술술 언급하는 뛰어난 숫자 감각에 놀랐다. 물리학과 화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과학자다운 면모였다. 비권위적이며 실용적인 리더십의 소유자로서 메르켈의 면모를 알 수 있는 일화를 들은 적이 있다. 2014년 메르켈 총리는 극비리에 삼성전자 최고경영자(CEO)를 베를린 집무실로 초청한 뒤 단도직입적으로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새로운 산업 물결에 어떻게 대비하고 준비하는 게 좋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