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문명덕후가 걷어낸 서양 문명의 커튼 – 안계환 지음 『문명 덕후의 시간탐험』
덕후라는 이름의 무게
‘덕후’는 어떤 대상을 매우 좋아하여 깊이 파고들고, 그 분야의 지식과 자료와 경험을 두텁게 쌓은 사람을 뜻합니다. 이 책의 저자이자 스스로를 ‘문명 여행자’라 칭하는 안계환 작가는, 제가 이 책을 통해 확인한 바로 분명한 문명 덕후입니다. 네이버 블로그와 유튜브에서 같은 이름으로 오랜 시간 활동해 온 이력은, 그의 관심이 일시적인 흥미가 아니라 꾸준히 쌓아 온 축적임을 보여 줍니다.
서양 문명의 커튼을 걷다
우리는 지금까지 학교 교과서와 다양한 소스를 통해 서양 문명을 언제나 인류를 앞으로 이끈 모범으로 배웠고, 그 성취를 따라야 할 대상으로 받아들여 왔습니다. 그러나 안계환 작가는 세상의 모든 이치가 그러하듯 문명에도 빛과 그림자가 함께 존재한다는 문제의식에서 이 책을 썼습니다. 저자는 프롤로그에서 “문명을 제대로 사랑하려면, 그 문명이 만든 빛만이 아니라 그림자까지 봐야 한다”고 말하며, 무대만 감상하고 커튼 뒤는 보지 않는 관객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합니다. 교과서에도, 유튜브에도, 어디에서도 잘 드러나지 않은 서양 문명의 감추어진 이야기를 밝히기 위해 집필에 나섰던 것이죠.
방대한 범위, 입체적인 시선
이 책은 이집트 문명에서 출발하여 그리스, 로마, 중세 유럽, 이슬람, 근대 유럽까지 여섯 개의 문명권을 다루며 총 46개의 질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예컨대 피라미드 건설 노동자들이 실은 국가로부터 식사와 의료까지 제공받은 숙련 인부였다는 사실이나, 아테네 민주주의를 이끈 페리클레스가 말한 ‘시민’이 실제로는 부모 모두가 아테네 출신인 성인 남성에 한정되어 여성이 철저히 배제되었다는 사실을 짚어 냅니다. 로마 편에서는 콜로세움의 검투 경기와 전차 경주가 중요한 정치적 사안이 논의되는 날에 맞추어 열림으로써 시민의 관심을 분산시키는 장치로 쓰였다는 점을, 근대 유럽 편에서는 구텐베르크의 인쇄기가 성경보다 먼저 대량으로 찍어 낸 것이 다름 아닌 면벌부 양식지였다는 사실을 밝힙니다. 각 문명을 하나의 시선으로 단순화하지 않고 빛과 그림자를 함께 조명하며 입체적으로 분석하는 구성은, 이 책이 단순한 지식 나열이 아니라 하나의 문제의식을 끝까지 밀어붙인 결과임을 보여 줍니다.
전공자가 아니기에 가능했던 발견
안계환 작가는 서양사나 철학을 전공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문명덕후로서 문명사 연구를 즐겨해 왔고, 책을 쓰고 강의하는 일을 오랫동안 이어 왔습니다. 특히 코로나 시기를 지나면서 문명사 연구를 한층 더 깊이 있게 다졌고, 그 결실이 이번 책으로 이어졌습니다. 헤로도토스를 비롯한 역사 기록자들을 멘토로 삼아 왔다는 점, 그리고 현장 답사를 통해 사실에 근거한 사관을 갖추려 노력해 왔다는 점은 전문 연구자의 틀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시선이 이 책의 발견을 가능하게 한 힘이었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일독을 권합니다
책을 읽어 나가면 이야기 자체가 주는 재미와 함께, 그동안 단편적으로만 알고 있던 서양 문명사가 빛과 그림자로 입체적으로 조명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서양 문명을 부정하기 위한 책이 아니라, 그 문명을 온전히 이해하고 사랑하기 위한 책이라는 저자의 태도가 곳곳에서 느껴집니다. 유익하고 흥미로운 책으로, 일독을 권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