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 속에서 잠든 씨앗
상담실에 마주 앉은 은행원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20년을 넘게 일했는데, 제가 뭘 잘하는지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그는 실적이 나쁜 직원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성실함으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정작 자신의 강점이 무엇인지, 어떤 일에서 진짜 힘을 발휘하는지는 한 번도 제대로 들여다본 적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메타인지란 자신이 무엇을 잘하고 무엇을 잘하지 못하는지를 인지하는 능력입니다. 인간은 저마다 타고난 성향을 갖고 태어납니다. 그 성향을 일찍 붙잡아 낼수록 발견하고 활용할 수 있는 시간이 길어집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평생 자신의 성향이 무엇인지 발견하지 못한 채 살아갑니다. 겉으로 드러난 성과와 역할에 자신을 맞추다가, 정작 그 안에 무엇이 숨어 있는지는 들여다보지 못하고 지나칩니다.
AI는 이 흐름을 더 가속시킵니다. 무엇을 물어도 즉시 정답에 가까운 답을 내놓는 세상에서, 사람들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는 습관 자체를 잃어버립니다. 진로도, 적성도, AI에게 몇 줄 입력하면 그럴듯한 목록이 쏟아집니다. 그러나 그 목록은 데이터의 평균일 뿐, 나의 뿌리에서 길어 올린 답이 아닙니다.
자신의 성향을 발견하는 일은 결코 간단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생각의 깊이에 비례합니다. 얕게 생각하는 사람은 표면에 드러난 결과만 보고 자신을 판단합니다. 반면 깊이 생각하는 사람은 그 결과 뒤에 숨은 자신의 진짜 동력을 찾아냅니다. 생각하는 힘을 키우지 않으면, 타고난 성향은 평생 땅속에 묻힌 씨앗으로 남습니다.
일상에서 자신의 성향을 발견하면 삶을 살아가는 데 큰 힘이 됩니다. 비즈니스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성향을 아는 사람은 어떤 일을,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 갈 것인지에 대한 방향을 훨씬 쉽게 찾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타고난 성향을 발견하고 활용할 수 있을까요. 세 가지로 정리해 보았습니다.
첫째, 뿌리는 스스로 말하지 않습니다
타고난 성향은 저절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성적표나 실적표 같은 표면적인 결과만으로는 그 사람의 진짜 성향을 알 수 없습니다. 결과는 성향의 그림자일 뿐, 성향 그 자체가 아닙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자신이 잘하는 일과, 남들이 잘한다고 평가하는 일을 혼동합니다. 조직이 부여한 역할을 오래 수행하다 보면, 그 역할이 곧 자신의 정체성이라고 착각하게 됩니다.
메타인지는 자기 관찰과 질문이 쌓여야 만들어집니다. 얕은 생각으로는 이 관찰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하루를 마치고 “오늘 나는 언제 시간 가는 줄 몰랐는가”를 스스로에게 묻는 사람과, 그런 질문을 던지지 않는 사람 사이에는 시간이 갈수록 자기 이해의 깊이에서 큰 차이가 생깁니다. 그 은행원 역시 처음에는 이 질문 앞에서 오래 침묵했습니다. 20년을 몸담은 조직의 언어로는 자신을 설명할 수 있었지만, 자신의 언어로는 좀처럼 설명하지 못했습니다.
AI에게 “나는 무엇을 잘합니까”라고 묻기 전에, 먼저 이 질문을 종이 위에 자신의 손으로 적어 보십시오. 몰입의 순간과 지루함의 순간을 구분해서 기록하는 습관이, 뿌리를 향해 처음 삽을 대는 일입니다.
둘째, 작은 선택들이 뿌리의 모양을 그립니다
성향은 큰 사건이 아니라 반복되는 작은 선택 속에서 그 모양을 드러냅니다. 회의에서 숫자를 먼저 확인하는 사람과 사람들의 반응을 먼저 살피는 사람, 문제를 혼자 풀려는 사람과 함께 풀려는 사람. 이런 사소한 패턴이 쌓이면 그 사람의 타고난 성향이 서서히 윤곽을 드러냅니다.
앞서 언급한 은행원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코칭 과정에서 그가 무의식적으로 반복해 온 행동을 함께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는 숫자를 다루는 업무보다, 까다로운 고객을 설득해 합의를 이끌어 내는 순간마다 유난히 생기가 돌았습니다. 계약이 성사되지 않아도, 상대의 마음이 조금씩 열리는 그 과정 자체를 즐기고 있었습니다. 본인은 그것을 그저 업무의 일부로 여겼을 뿐, 그것이 자신의 성향이라는 것을 한 번도 자각하지 못했습니다.
방법은 어렵지 않습니다. 지난 한 달간 스스로 내린 작은 결정들을 목록으로 적어 보십시오. 어떤 순간에 망설임 없이 나섰는지, 어떤 순간에 뒤로 물러섰는지를 살펴보고, 그 안에서 반복되는 공통점을 찾아보십시오. 혼자서는 잘 보이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가까운 동료나 가족에게 “내가 어떤 순간에 가장 나다워 보였는가”를 물어보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타인의 눈에 비친 반복된 모습이, 내가 놓친 조각을 채워 줍니다.
셋째, 발견한 성향은 작은 실험으로 확인해야 합니다
성향을 발견했다고 곧바로 확신할 필요는 없습니다. 머릿속으로 짐작한 성향과 실제로 부딪혀 본 성향은 다를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활용의 첫 단계는 큰 결단이 아니라 작은 실험입니다. 회사를 그만두거나 사업자를 내지 않고도, 지금 자리에서 그 성향을 시험해 볼 방법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 은행원은 자신의 성향이 ‘설득과 협상’에 있다는 것을 발견한 뒤, 곧바로 창업하지 않았습니다. 먼저 사내 신입 행원들을 대상으로 협상 사례를 나누는 소모임을 자청해서 열었습니다. 그 작은 모임에서 반응이 뜨거웠습니다. 참가자들이 다음 모임을 먼저 물어 올 정도였습니다. 그 확인을 거친 뒤에야 그는 퇴직 후 협상 전문 강사로 창직의 길을 열었습니다. 20년간 쌓은 경험은 사라지지 않고, 검증된 성향 위에서 새로운 직업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실험은 세 갈래로 설계할 수 있습니다. 지금의 조직 안에서 시도해 볼 작은 역할, 주말이나 저녁 시간을 활용한 부업 형태의 시도, 그리고 글이나 강의처럼 낯선 사람 앞에 자신을 드러내는 도전입니다. 이 세 갈래 중 하나라도 반응이 온다면, 그것이 성향을 사업이나 직업으로 키울 수 있다는 첫 신호입니다. 반응이 없다면 낙담할 일이 아니라, 방식을 바꾸어 다시 시도할 단서로 삼으면 됩니다. 성향은 한 번의 확인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작게 시도하고, 반응을 살피고, 다시 조정하는 순환을 반복할 때 비로소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자리 잡습니다.
다시, 땅을 파는 사람
뿌리는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하고, 작은 선택들이 그리는 모양을 관찰하며, 발견한 성향을 작은 실험으로 확인해 가는 것 – 이 세 가지가 쌓일 때 타고난 성향은 비로소 삶의 방향이 됩니다.
다시 상담실의 그 은행원을 떠올려 봅니다. 20년이 넘도록 자신이 무엇을 잘하는지 몰랐던 그가, 몇 달의 질문과 관찰과 작은 실험 끝에 자신의 뿌리를 찾아냈습니다. 그 뿌리는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다만 아무도, 그 자신조차도 땅을 파 보지 않았을 뿐입니다.
AI는 앞으로 더 빠르고 더 정교한 답을 내놓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 안에 묻힌 뿌리를 대신 파 줄 수는 없습니다. 그 삽질은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오늘 하루,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 하나와 작은 시도 하나에서 그 삽질은 다시 시작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