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딩 파티(Anding Party>
배고프고 가난했던 시절, 버스비 아끼고 걸어서 갈 수 있는 학교라는 이유로 엉겹결에 입학한 학교가 있었다. 이름조차 생소한 브니엘고등학교였다. 미션스쿨이었고 남녀공학이었다.
왜 그랬던지 학교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공부가 재미있을 리 없었다. 재수를 해서라도 폼나는 학교를 가보려 기회를 노렸다. 그 때마다 내 발길을 붙잡는 이가 있었다. 성경과목을 가르친 이정삼목사님이셨다.
뻥을 치는 것 같은데 구라는 재미있었다. 연애, 오락, 시사, 문학… 종횡무진이었다. 결론은 언제나 눈물이었다. 나도 모르게 두 주먹을 불끈 쥐게 만들었다. 속으면 안 된다고 벼르지만 결국은 속고(?) 또 속다가 1년을 보내고 말았다.
다음 해부터 평준화 작업으로 추첨제로 학교를 가게 되었다. 뺑뺑이 돌려 또 다시 이 학교로 돌아올 것 같은 불안감에 주저 앉게 되었다. 다음 해, 덜컥 종교부 차장이라는 감투를 썼다. 부장은 이규현(지금의 수영로교회 담임)이었다.
학교 이름(브니엘:하나님의 얼굴)의 뜻도 모른 채 입학했고 그 가치도 모른 채 졸업했다. 그 뜻을 알게 된 것은 신학을 공부하고나서였다. 교명만이 아니었다. 교훈도 그랬다. 대부분의 학교들의 10단어 이내로 갈무리 되는 교훈과 사뭇 달랐다. 무려 101자나 되었다. 명사형이 아닌 동사형이었다. 나는 훗날에야 그 가치를 알고 감동해 울었다.
나는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야 감히 쳐다보지도 못했던 박성기 교장선생님에게 이끌려 미 하야리야 부대에서 스테이크를 제일 많이 얻어먹은 제자가 되었다. 선생님은 내게 바울신학을 제일 많이 이야기했고 한국교회의 장래를 걱정하셨다. 국어를 가르쳐 주신 박호갑선생님은 지금까지 명절이면 샌베이 과자를 보내 주신다. 몸둘 바 모를 사랑이었다.
내 발목을 붙잡았던 이정삼 목사님은 입학한 그날로 부터 50년이 다 된 지금까지 나를 챙기신다. 읽은 책을 소개하시고 자료를 보내주신다. 내 강의나 설교를 피드백 하신다.
최근 친구이셨던 정필도 목사님을 떠나 보내고 회환에 젖은 목소리와 안타까움이 나를 울렸다. 목사님을 위해 무언가를 하고 싶었다. 그게 엔딩 파티였다. 목사님을 사랑하고 따르는 제자들이 어울려 언제 찾아올지 모를 임종의 시간을 미리 나누고 싶었다. 목사님도 흔쾌히 응하셨다.
목사님의 <마지막 수업>을 듣고 싶었다. 50년 전으로 돌아가 당시 쪽팔렸던(?) 교복을 입고 싶었다. 학교를 외면했던 데 대한 일종의 속죄의식이다. 도시락을 까먹고 목사님과 학창시절의 에피소드와 함께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다시 길고 긴 교훈 앞에 우뚝 서고 싶었다.
그렇다.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주님처럼 우리들의 발을 씻겨주시며 남기실 축복으로 남은 생애를 힘차게 살아내고 싶다. 야곱과 요셉처럼 창세기의 죽음으로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싶다.
※ 현장에 다 모일 수 없어 줌으로 중계를 할 예정이다. 선생님에 대한 고마움을 스승의 노래에 담아 떼창으로 선물한다. 목사님의 카퍼레이드도 중계할 것이다.
궁금한 브니엘 동문들은 정인모동문(부산대)에게 연락해 주시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