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은 퇴직하지 않는다

명함을 반납하던 날

30년 넘게 직장에서 일한 분들을 만나면 비슷한 말을 자주 듣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해 온 일이 과연 쓸모가 있을까요.” 직함이 적힌 명함을 반납하는 날이 다가올수록 그 목소리는 점점 작아집니다. 수십 년 동안 회의를 이끌고, 거래처를 설득하고, 위기를 수습해 온 사람이 정작 자기 경험 앞에서는 자신이 없습니다.

AI가 등장한 뒤 이 자신 없음은 더 깊어졌습니다. 보고서도, 기획안도, 시장분석도 몇 초 만에 나오는 화면을 보면서 많은 사람이 자신의 30년을 스스로 깎아내립니다. 기계가 다 하는 세상에 내 경험이 무슨 소용이냐고 말합니다. 경험을 가장 먼저 무시하는 사람은 세상보다 본인입니다.

AI가 학습한 것은 문서로 남은 지식입니다. 상대의 표정이 굳는 순간 말을 바꾸던 감각, 숫자 뒤에 숨은 사정을 읽어 내던 안목, 같은 실수를 두 번 하지 않게 만든 판단의 기준은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이런 경험은 꺼내 쓰지 않으면 그대로 묻힙니다. 그렇다고 모든 경험이 쓸모 있는 것은 아닙니다. 30년 가운데 옥과 돌을 가려내고, 가려낸 옥을 새로운 직업으로 다듬어야 합니다. 그 과정을 세 가지로 정리합니다.

첫째, 책을 읽고 글을 쓰며 경험을 다시 읽으십시오

옥석을 가리는 힘은 메타인지에서 나옵니다. 자신이 무엇을 잘하고 무엇을 잘하지 못하는지 아는 능력입니다. 많은 직장인이 직함과 업무 목록을 경험으로 착각합니다. 부장으로 몇 년, 기획팀에서 몇 년이라는 경력은 이력서의 한 줄입니다. 그 자리에서 무엇을 판단했고, 어떤 순간에 남다른 결과를 냈는지가 경험입니다.

필자도 50대 초반까지 책을 읽지 않았고 글도 쓰지 않았습니다. 20년 직장 생활을 했지만 제 경험이 무엇인지 말로 설명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책을 읽고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지나온 일들을 다시 들여다보게 되었습니다. 남의 문장을 읽으며 필자의 경험을 비추어 보고, 필자의 경험을 문장으로 옮기면서 무엇이 강점이고 무엇이 그저 지나간 일이었는지가 드러났습니다. 글로 쓸 수 없는 경험은 아직 필자의 것이 되지 못한 경험이었습니다.

실천은 간단합니다. 지난 직장 생활에서 동료들이 유독 나를 찾아왔던 순간을 떠올려 적어 보십시오. 그 순간이 반복된다면 그것이 옥입니다. 아무리 오래 일을 했어도 누구도 나를 찾지 않았던 일은 돌로 내려놓아야 합니다.

둘째, 가려낸 경험은 한 사람 앞에서 다듬으십시오

가려낸 경험은 써 보아야 값이 드러납니다. 머릿속에서 옥이라고 판단한 경험도 실제로 누군가에게 쓰일 때 비로소 직업이 될 수 있는지 확인됩니다.

필자는 책과 글로 찾아낸 강점을 일대일 코칭에서 썼습니다. 한 사람 앞에 앉아 그 사람의 길을 함께 찾는 동안, 직장에서 쌓은 경험이 질문이 되고 조언이 되었습니다. 경험을 쓸수록 생각은 넓어졌고, 15년 동안 같은 방향을 지키는 동안 창직 전문가라는 브랜드도 단단해졌습니다. 경험은 쓰는 만큼 깊어집니다.

창직은 거창한 일에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가려낸 경험 하나를 들고 한 사람을 돕는 일에서 시작합니다. 후배 한 명의 고민을 들어주거나, 작은 모임에서 30분 동안 내 경험을 나누어 보십시오. 상대가 다음 만남을 먼저 청한다면, 그 경험은 새로운 직업의 씨앗입니다.

셋째, AI를 경험의 협업자로 삼으십시오

AI가 나온 뒤 필자는 날개를 단 셈입니다. AI는 이론으로 쓸 때보다 사람의 경험과 함께 쓸 때 본격적인 힘을 냅니다. 경험이 없는 사람이 AI에게 물으면 평균의 답이 돌아옵니다. 경험이 있는 사람은 그 답을 평가하고 확장해서 쓸 수 있습니다.

방법은 이렇습니다. 가려낸 경험을 AI에게 이야기처럼 풀어놓고, 답을 달라고 하는 대신 질문을 던져 달라고 요청하십시오. 그때 왜 그렇게 판단했는지, 다른 사람이었다면 어떻게 했을지를 묻는 질문 앞에서 머릿속에만 있던 경험이 언어가 됩니다. 언어가 된 경험은 강의안이 되고, 책의 목차가 되고, 코칭의 질문지가 됩니다. AI는 경험을 꺼내고 정리하는 속도를 몇 배로 높여 줍니다.

경험은 퇴직하지 않습니다

책과 글로 경험을 다시 읽어 옥석을 가리고, 가려낸 경험을 한 사람 앞에서 다듬으며, AI와 함께 그 경험을 키워 가는 것, 이 세 가지가 쌓일 때 20년 또는 30년의 경험은 새로운 직업이 됩니다.

다시 명함을 반납하는 그 사람을 떠올립니다. 회사가 거두어 가는 것은 직함입니다. 그가 쌓은 판단과 안목은 회사가 거두어 갈 수 없습니다. 직함은 퇴직해도 경험은 퇴직하지 않습니다. 경험을 퇴직시키는 것은 자기 경험을 스스로 깎아내리는 태도입니다. AI가 빨라질수록 사람이 겪어 온 시간의 값은 높아집니다. 오늘 책 한쪽을 읽고, 지난 일 하나를 글로 적어 보십시오. 그 한 줄에서 묻혀 있던 경험은 다시 일을 시작하게 합니다.